1884년 1월, 웨일스의 란트리산트 언덕에서 장례가 중단됐다. 윌리엄 프라이스가 숨진 아들을 화장하려고 불을 붙이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기의 유해는 불에서 꺼내졌고, 아버지는 경찰에 체포됐다. 다섯 달 된 아이를 보내려던 일이 형사재판으로 이어졌다.

프라이스는 여든을 넘긴 의사였다. 런던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웨일스로 돌아와 진료해온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드루이드의 지도자라고 선언하고 별도의 의식을 치렀다. 옛 켈트 세계의 종교를 되살리려는 그의 믿음은 주위의 기독교 관습과 자주 부딪혔다.

장례에서도 그 차이가 드러났다. 프라이스는 시신을 땅에 묻어 썩게 두는 일에 반대했다. 화장을 자기 종교의 의식으로 받아들였고, 아들에게도 그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불타는 시신을 장례의 새로운 선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격한 반응은 경찰이 개입해야 할 정도로 커졌다.

그때 영국에서 화장을 둘러싼 문제는 장례 취향만의 일이 아니었다. 시신을 태우면 사망 원인을 조사할 증거도 없어질 수 있었다. 독살이나 폭력으로 죽은 사람의 유해를 없애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정부는 화장 운동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 우려는 프라이스의 사건에서도 중요했다. 아기의 유해를 조사하고 사망 원인을 살피는 절차가 진행됐다. 재판에서는 시신을 태우려 했다는 점뿐 아니라 그 행위가 검시를 막으려는 것이었는지도 다뤘다. 장례 방식과 죽음에 관한 조사를 구별해야 했다.

재판은 1884년 2월 카디프에서 열렸다. 프라이스는 자기 방어를 직접 맡았다. 그를 심리한 판사는 제임스 피츠제임스 스티븐이었다. 사람들이 격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화장을 범죄로 처벌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스티븐 판사는 화장 자체를 금지하는 법적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러면서 모든 화장을 아무 조건 없이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공공의 방해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시신을 태우거나, 필요한 검시를 막는 일은 따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프라이스는 무죄를 받았다.

이후 프라이스는 아들의 유해를 돌려받았다. 그해 3월, 처음 끝내지 못한 화장을 마쳤다. 1월의 장례를 막았던 반대와 재판이 지나간 뒤에야 아이의 장례가 마무리됐다.

판결을 기다린 사람은 프라이스만이 아니었다. 영국에는 이미 1874년에 만들어진 화장협회가 있었다. 협회는 워킹에 시설을 마련했지만, 법적 불확실성과 정부의 반대 때문에 사람의 시신을 화장하는 일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란트리산트 언덕의 사건은 이 단체에도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됐다.

판결 뒤 협회는 신청자의 유해를 받아 화장하겠다고 알렸다. 다만 죽음에 범죄가 얽혀 있는데도 증거를 없애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서류와 의료 확인 절차를 두었다. 1885년 워킹에서는 지넷 피커스길의 화장이 이뤄졌다. 프라이스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일과 그 방식을 운영할 절차를 마련하는 일이 함께 진행됐다.

한 번의 무죄 판결로 논쟁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1884년 의회에서는 화장을 허가된 장소에서만 하도록 규정하자는 법안이 논의됐다. 그해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화장시설과 운영을 규율하는 법률이 만들어진 것은 1902년이었다.

프라이스 자신은 그보다 앞선 1893년에 세상을 떠났고, 자신이 원한 대로 화장됐다. 많은 사람이 장례를 보러 모였다. 남아 있는 당시의 기록에는 성직자가 웨일스어로 장례 예식을 진행했다는 대목도 있다. 시신을 땅에 맡긴다는 부분에 이르자 문구를 바꿨다. 이번에는 ‘불에’ 맡겼다.

편집 책임

팩토스브레인 편집부

이 기사는 팩토스브레인 편집부가 자료를 검토하고 편집 원칙에 따라 작성·검수했습니다. 오류 제보는 정정 정책에 따라 확인합니다.

편집부 소개오류 제보 및 정정 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