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에 극장이 있었고, 무대 위에는 성의 주인이 있었다. 영국 앵글시의 제5대 후작 헨리 패짓이었다. 흰 비단 의상 위로 여러 색의 조명이 비치면 그는 천을 펼쳐 춤을 췄다. 이 ‘나비 춤’으로 얻은 별명이 ‘춤추는 후작’이었다. 손님을 위해 공연을 불러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그 공연의 볼거리가 된 귀족이었다.

그에게는 무대를 마련할 돈이 있었다. 1898년 작위와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았을 때, 나이는 스물세 살이었다. 웨일스의 저택 플라스 뉴이드도 그의 손에 들어왔다. 패짓은 이 집을 ‘앵글시 성’이라 부르고, 예배당에 마련돼 있던 공연 공간을 자기 극장으로 꾸몄다. 객석 150석의 게이어티 극장이었다. 자신의 집에서 무대와 의상을 고르고 직접 출연할 수 있었다.

공연은 친구나 하인, 이웃과 함께 시작했지만 그 수준에만 머물지 않았다. 1901년에는 전문 극단을 데려왔다. 상연작에는 《알라딘》과 《빨간 모자》 같은 대중적인 작품이 있었고, 패짓은 그 안에서 맡은 역할에 맞춰 화려하게 등장했다. 연구자 비브 가드너가 소개한 동료 배우의 일기에는 후작이 밤마다 다른 의상을 입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한 벌을 잘 마련해 오래 입는 식의 취미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객석이 귀족들만의 자리는 아니었다. 이웃 상인과 하인, 학생, 지역을 찾은 방문객도 무료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극단이 다른 지역 공연장으로 나갈 때는 입장 수입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도 했다. 패짓은 의상을 입은 자기 사진엽서를 관객에게 나눠줬다. 집의 주인이 무대에 서고, 그 무대의 모습을 기념품으로 건네는 공연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갈렸다. 공연 소식에는 춤의 성공이 전해졌지만, 부유한 귀족이 보석을 두르고 춤춘다는 사실은 조롱거리도 됐다. 옷과 보석을 사들이는 지출은 계속됐다. 1904년 그가 파산했을 때, 한 공연 전문지는 연극만 탓할 일은 아니라며 그를 변호했다. 돈을 크게 삼킨 것은 보석과 다른 사치품이며, 그의 극단은 자선 공연에도 기여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에도 ‘춤추다 재산을 날린 귀족’이라는 한 줄로만 설명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빚을 갚기 위한 매각이 시작되자 저택은 다른 구경거리를 내놓았다. 보석과 옷, 자동차뿐 아니라 냄비와 양동이 같은 생활용품까지 매물로 나왔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모였다. 무대 위에서 빛나던 의상들이 이제는 다른 사람의 옷장이 될 곳을 기다렸다.

경매장에서는 옷을 입어 보여주는 직원이 새 출연자처럼 움직였다. 당시 보도를 인용한 가드너의 연구에 따르면 ‘제리’라는 직원이 옅은 초록색 외투를 입었다가 짧은 크림색 옷으로 갈아입고, 분홍 안감을 댄 옷감을 둘러쓰며 물건을 선보였다. 관객은 웃었고 경매는 계속됐다. 후작이 자신을 드러내려고 모은 옷들은, 주인이 떠난 자리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일부 옷은 실제 공연장으로 돌아갔다. 남성 역할로 유명했던 공연자 베스타 틸리는 경매에서 패짓의 조끼들을 사들였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입고 무대에 섰고, 그 옷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도 알려졌다. 패짓에게 자신을 꾸미는 옷이었던 것이 다른 배우에게는 멋을 잔뜩 부린 남자를 연기하는 의상이 됐다.

패짓은 매각 전에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고, 1905년 스물아홉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사진에는 날개 달린 투구와 보석, 극중 인물을 위한 의상이 남아 있다. 한때 극장과 옷의 주인이었던 사람은 사라졌지만, 그 옷을 입은 모습만큼은 지금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살아 있을 때 관객에게 나눠주던 사진들이 그의 가장 선명한 흔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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