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들여다보면

알파벳이 A, B, C 순서인 까닭은 소리나 모양을 가장 합리적으로 분류한 결과가 아니라, 아주 오래된 문자 순서를 여러 문화가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어 알파벳의 뼈대는 고대 서아시아의 문자 전통에서 페니키아 문자, 그리스 문자, 에트루리아 문자를 거쳐 라틴 문자로 전해졌다. 다만 최초의 사람들이 왜 하필 그 정확한 순서를 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문자에는 본래 자연이 정해 준 줄서기가 없다. 입술로 내는 소리를 먼저 놓거나 자주 쓰는 글자를 앞세울 수도 있고, 모양이 비슷한 기호를 묶을 수도 있지만 A부터 Z까지의 배열은 어느 원칙에도 일관되게 맞지 않는다. 알파벳 순서는 각 글자의 발음 규칙이라기보다 글자 집합에 붙은 공동의 목록이다. 그래서 같은 기호를 다른 순서로 가르쳐도 언어를 적는 기능은 유지되지만, 사전과 명단을 함께 쓰는 사람들은 약속된 한 순서를 알아야 한다.

그 약속이 매우 오래됐다는 증거가 시리아 해안의 고대 도시 우가리트에서 나온다. 기원전 2천년기에 그곳의 서기관들은 점토에 쐐기 모양 기호를 눌러 독특한 알파벳 문자를 썼다. 발굴된 여러 ‘아베케다리’, 즉 글자를 순서대로 적은 연습용 철자표는 앞부분이 훗날의 북서 셈 문자 배열과 크게 닮았다. 우가리트 문자는 모양과 글자 수가 페니키아 문자와 같지는 않지만, 순서의 전통이 페니키아의 전성기보다 앞서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다. 일부 우가리트 자료에는 남셈 계통과 연결되는 다른 배열도 남아 있어 고대에 순서가 하나뿐이 아니었음도 알 수 있다.

페니키아 사람들이 지중해 전역에서 사용한 자음 문자는 그 오래된 배열을 간결한 글자 체계에 담아 널리 퍼뜨렸다. 첫 글자들의 전통적 이름은 대략 알레프, 베트, 기멜, 달레트였고, 각각의 이름은 그 글자가 나타내는 소리로 시작했다.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1천년기 초에 이 문자를 받아들일 때 자기 언어에 필요하지 않은 몇몇 자음 기호를 모음으로 바꾸는 큰 혁신을 했지만, 익숙한 줄과 이름은 상당 부분 보존했다. 알레프와 베트는 알파와 베타가 됐고, 뒤에는 감마와 델타가 이어졌다.

그리스 알파벳도 한 번에 오늘의 24자로 고정된 것은 아니다. 지역마다 기호와 음가가 달랐고, 필요한 글자를 더하거나 쓰지 않는 글자를 남겨 두는 방식도 달랐다. 그래도 기본 배열은 학습하고 암송할 수 있는 골격으로 유지됐다.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인들이 서부 그리스계 문자를 받아들였고, 로마인들은 다시 그 계통의 문자를 라틴어에 맞게 손질했다. 따라서 영어의 ABC는 그리스 문자를 곧바로 복사한 것이 아니라 여러 언어와 공동체가 중간 단계마다 고쳐 쓴 계보의 끝에 가깝다.

현재 순서에 남은 이음매를 보면 그 역사가 더 잘 보인다. 초기 라틴 문자에서는 C가 오늘날의 C와 G에 해당하는 소리를 모두 맡았고, 나중에 획을 하나 더한 G가 생겨 기존 배열의 일곱째 자리에 들어갔다. 그 자리에 있던 Z는 당시 라틴어에 불필요해 빠졌다가 그리스어 차용어를 적기 위해 Y와 함께 알파벳 끝에 다시 들어왔다. J, U, W도 훨씬 뒤에 I와 V의 용법이 갈라지거나 결합하면서 별도 글자로 정착했다. 그러므로 현대의 26자는 고대 배열을 그대로 얼려 둔 복제품이 아니라, 오래된 순서 위에 증축한 건물과 같다.

이 순서가 살아남은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공유할수록 더 유용해지기 때문이다. 서기관과 학생은 일정한 순서로 글자 이름을 외우면 빠진 글자를 확인하고 연습판을 만들기 쉬웠다. 글자에 수의 값을 부여하거나 두문시를 구성할 때도 고정된 줄이 기준이 됐다. 훗날 사전, 도서 목록, 인명부와 서류철이 알파벳순을 사용하면서 바꾸는 비용은 더욱 커졌다. 순서 자체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같은 약속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검색 도구가 된 셈이다.

정확한 최초 이유를 설명하려는 가설은 여럿 있다. 글자 이름을 의미 있는 묶음이나 기억 노래로 엮었다는 견해, 기호 제작의 역사와 관련됐다는 견해가 있지만 이를 확정할 직접 기록은 없다. 가장 이른 알파벳 문자와 순서가 적힌 자료 사이에도 빈틈이 있고, 북서 셈 계통과 남셈 계통에는 서로 다른 고대 배열이 있었다. 고고학은 ‘이 순서가 언제까지 올라가는가’와 ‘어느 문화가 이어받았는가’에는 답을 넓혀 주지만, 최초 설계자의 생각까지 되살리지는 못한다.

‘알파벳’이라는 낱말 자체가 이 긴 전승을 압축한다. 그리스 문자의 첫 두 이름 알파와 베타를 합친 말이며, 그 이름들 역시 더 오래된 알레프와 베트의 후손이다. 그래서 A, B, C는 어떤 영원한 자연법칙의 첫 세 칸이 아니다. 청동기시대 서기관의 학습 순서가 새로운 언어를 만날 때마다 조금씩 고쳐지면서도, 함께 외우기 좋은 공용 골격이라는 이유로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은 문화적 화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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